레인보우 식스(Rainbow Six)에 대한 추억

40 넘게 살면서 지금까지 남보다 가장 더 잘한 게 무엇이냐 하면 (안타깝게도) 총 쏘는 게임 레인보우 식스((Tom Clancy's Rainbow Six, R6)이다. 레인보우 식스가 시리즈로 지금까지 계속 있는 것으로 아는데 내가 말하는 것은 레인보우 식스 오리지널이다. 1998년에 출시되었다고 하는데 내가 군대에 있을 때 우리나라에 PC방이 처음 생겼고, 휴가 나와서 PC방에 뭔가 하고 갔다가 남들 다 스타크래프트 1을 할 때 내 취향이 아닌 것 같아서 깔려 있는 다른 게임이었던 이 레인보우 식스를 하게 된 게 인연이었을 것이다. 천부적으로 총 쏘는 게임을 잘하는지 군대 제대하고 PC방에서 그 게임을 하면 다른 친구들보다 많이 잘했고 너무 재미있었다.


대학생 때 공부는 완전히 뒷전이고 당구와 PC방에서만 살았는데 학교 앞 PC방에서 거의 다 스타크래프트 1 하는데 나 포함 소수의 몇 명이 레인보우 식스를 했고, 그때 PC방에서 TSB_air2air 라는 놈을 만났다. 피부가 좀 안 좋은 놈이었는데 이놈이 이 게임 같이 모여서 하는 PC방이 있다면서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한 곳이 신림동의 골드러시라는 PC방이었다. 2층인가 3층이었고 들어가는데 오! PC방 전체가 레인보우 식스를 하는 사람들만 앉아 있었다. 이미 이 air2air 라는 놈은 지들끼리 패거리(클랜)로 모여서 팀 경기도 하고 그러는 것이다. 난 팀이 없으니 그냥 빈 자리에서 혼자 했다. 지금과 달리 그 당시에는 헤드셋 끼우고 보이스로 정보를 주고 받고 그런 시스템이 없었기 때문에 팀원과 정보를 주고 받기 위해서는 같은 PC방에 모여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렇게 PC 사양이 좀 괜찮다 싶은 PC방에는 레인보우 식스를 하는 클랜들이 많이 왔다. 며칠인지, 몇 주인지 air2air 라는 놈과 같이 이 골드러시 PC방에 가긴 가도 혼자 한 것 같았는데 어느날 어떤 형님이 짜장면을 사 주면서 본인의 팀에 들어오라고 한다. 당연히 너무 좋았지. 나도 드디어 클랜원이 되는 거니까. 이 골드러시 PC방이 신림동에 있어서 그런지 고시 준비생인 나보다 나이 많은 형들이 많았다. 나보다 어린 친구들도 있었고.


내가 들어간 클랜의 이름은 Civilization 이었다. 문명. 줄여서 Civili. 뒤에 본인의 닉네임을 쓰는데 문명 클랜이라 닉네임을 다 문명 이름으로 지었었다. Hwangha, Orion, Aztec, Nazca, Maya(아하! 이 마야 형이 이 골드러시 PC방의 사장님! 글쓰면서 막 생각이 나네), India, Monggol, Mizi, Sirius, Egypt(더럽게 못 쏘는 놈 ㅋㅋ) 등등.. 다 생각이 나진 않고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 Civili_Minos. 당시 막내로 들어갔지만 이미 실력은 고수였지..  아, 여자 애도 한둘 있었는데..


부모님에게 공부한다고 거짓말을 한 건지 무슨 거짓말을 한 건지 암튼 나는 거기서 살았다. PC방에 작은 방도 있어서 밤새우면서 게임하다가 거기서 나란히 누워서 자기도 하고. 이틀 밤을 잠 한숨 자지 않고 게임하고 새벽에 거의 첫 버스로 집에 가는 생활을 반복했다. 집에 가는 버스에서 졸지 않으려고 버티다가 결국 막판에 조는 바람에 종점까지 간 적이 부지기수. 그 당시는 PC방에서 담배 피우는 게 아주 당연하다 보니 담배 물고 게임하다가 담뱃불 떨어져서 옷 빵꾸나는 것도 다반사. 초긴장 상태라서 잠시 마우스를 놓고 담배를 재떨이로 옮길 여유도 없어서 끝까지 물고 있다가 떨구는 것이다. 또 그냥 담배를 거의 물고 살다 보니 옷에 담배 찌든 냄새가 세탁을 해도 잠바에서 사라지지가 않아서 버리기도 했을 정도.


골드러시 PC방에서 Civili 클랜원으로 게임하다가 형들이 고시를 붙은 건지 포기하고 어디 시골로 내려간 건지는 몰라도 하나둘 사라지시고 또 이 게임이 워낙 PC의 사양이 중요하다 보니 우리도 또 다른 PC방을 찾아 떠나게 되었다. 두 번째 PC방은 홍대의 게토 PC방. 여기는 골드러시보다 더 큰 곳이었고 또 여기서 살다시피 하면서 레인보우 식스를 했다. 나는 이 게임을 한창 당시에 신(god)도 나를 이길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실제로 신은 아니었지만 아주 잘했고. 어느 오프라인 대회에 마우스와 키보드 들고 4:4 대회에 나가서 게임을 하는데 내 기준에서는 아주 간단한 샷인 90° 턴샷에 내 뒤에서 구경하는 모르는 사람들이 와! 와! 하며 탄성을 지르는 것을 듣곤 했다. 내가 또 아싸 기질이 있다 보니 내 메인 아이디인 Civili_Minos 로는 게임을 거의 하지 않고 yangmin, chaelim 등 아무 아이디나 막 만들어서 이런 무명 아이디로 돌아다니며 주로 용병을 뛰거나 또 좀 지가 한다고 깐죽대는 애들 있으면 1:1 로 발라주고.. 무명 아이디가 100개는 넘었을 것이다. 용병 뛰다가 좀 알려지면 또 다른 아이디 만들기를 반복.


나는 안다. 이 게임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자기가 고수(최고수)라고 생각한다는 것을. 하지만 나랑 게임상에서 만나보면 누구든지 그저 벌벌벌 떨며 200미터 백스텝으로 뒷걸음질을 치고 있는 본인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쉽게도 내가 속한 클랜이 강팀이 아니어서, 또 내 성격상 자랑하거나 으시대는 것을 좋아하지 않다 보니 그냥 재야의 고수로 지내기만 했다. 막판에는 역촌역쪽 PC방에 아지트를 잡고 이 Civili 클랜의 잔여 멤버들과 내 친구 몇과 게임을 했다. 신입이 Civili_Kangse 와 또 한 명이 있었는데.. 나보다 열 살은 더 어렸던 녀석들. 맨날 나한테 혼났지만 나중엔 어느 정도 고수는 되었지.


처음에 말했던 air2air 이놈 아이디가 생각이 나서 이놈 나올까 하고 구글에 검색해 보니 레인보우 식스 홈페이지가 하나 나온다. 자유게시판에 들어가 보면 전부 다 나같은 사람이다. 그때를 그리워하고 그때의 사람들을 그리워하는 사람들. 그때 게임하던 사람은 대부분 이제 40대~50가 되었을 테니 가정을 꾸리고 먹고 살기 바쁠 것이라 글이 어쩌다 하나 올라오지만 글쓴이 닉네임을 보면 다들 반갑다. 아직도 클랜 이름을 보면 생각이 새록새록 난다. 물론 전부 다 내 밑이라고 생각하지만.. ㅎㅎ


이제 와서 내가 이렇게 잘했고 내가 최고였다, 이런 말은 의미가 없다. 그저 그 당시 만났다가 헤어진 사람들 지금 다 잘 살고 있는가 궁금하다. 살아는 계신지. 지금 와서 다시 이 게임의 그래픽을 보면 너무 심하게 후져서 보기 힘들 정도이지만 이 게임 그대로 다시 나온다면 다시 또 해 보고 싶다. 그립다, 레인보우 식스. 하지만 그때 내 인생을 너무 허비했다는 아쉬움도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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